먼저 슬리퍼를 휘두른 쪽은 피해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당방위는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요양원에서 자신이 돌보던 80대 입소자를 폭행해 숨지게 한 60대에 대한 항소심입니다.
수원고등법원은 상해치사로 기소된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은 징역 4년을 선고했습니다. 피고인은 정당방위였다며 혐의를 부인해 왔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피고인은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2025년 11월 17일, 요양원에서 80대 입소자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얼굴 등을 여러 차례 때렸습니다. 피해자는 외상성 경막하 출혈 진단을 받고 다음 날 숨졌습니다.
계기로 보도된 것은 면도입니다. 가족 면회를 앞두고 피해자의 면도를 해주려 했는데 피해자가 이를 거부했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이 폭행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피고인은 재판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했습니다. 피해자가 슬리퍼를 들고 휘두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등의 행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취지입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망에 이를 정도의 유형력을 행사했고 정당방위로 볼 수 없다고 한 원심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밝혔습니다. 피고인의 행위를 방어가 아니라 분풀이로 평가했습니다.
상해치사는 사람을 다치게 하려 했는데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른 경우입니다.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어도 성립하고, 법정형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입니다. 살인죄보다는 가볍지만, 하한이 3년이어서 집행유예를 붙일 수 있는 구간에 그대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갈리는 것이 상해치사와 폭행치사의 경계입니다. 두 죄는 사람이 숨졌다는 결과가 같고, 상해의 고의가 있었는지에서 나뉩니다. 이 사건에서 상해치사가 적용된 것은 넘어뜨리고 얼굴을 여러 차례 때린 행위가 상해를 예정한 것으로 평가됐다는 뜻입니다.
살인죄가 아닌 이유도 같은 자리에서 설명됩니다. 죽이려는 의도까지는 인정되지 않았지만, 그런 폭행이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은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는 구조입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고의범만큼은 아니어도 무겁게 지우는 유형입니다.
올리는 쪽에는 세 가지가 놓입니다. 피해자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 피고인이 그 사람을 돌보도록 맡겨진 지위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사망이라는 결과입니다. 보호를 맡은 사람이 보호 대상에게 가한 폭력은 같은 정도의 폭력이라도 다르게 평가됩니다.
내리는 쪽은 이 사건에서 비어 있는 편입니다. 혐의를 다투었으므로 자백에 따른 참작은 놓이지 않았고, 유족과의 관계에서 어떤 정리가 있었는지는 보도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항소심이 원심의 형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1심 이후 새로 놓인 사정이 형을 움직일 만큼은 아니었다는 판단으로 읽힙니다.
피고인의 주장이 완전히 허구였는지는 이 사건의 쟁점이 아닙니다. 피해자가 슬리퍼를 휘두르고 물건을 던졌다는 사정 자체는 다투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정당방위는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정당방위를 오해하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의 문제로 알고 계십니다. 상대가 먼저 손을 댔으니 그 뒤의 일은 방어라는 식입니다. 실제 판단은 그렇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방어행위로 인정되려면 그 순간에 침해가 계속되고 있어야 하고, 대응이 그 침해를 막는 데 필요한 정도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두 조건 모두 시간 안에서 판단됩니다. 그래서 실무에서 정당방위가 무너지는 자리는 대개 시작점이 아니라 중간 어디쯤입니다.
이 사건에서 그 지점은 넘어뜨린 순간입니다. 상대를 바닥에 넘어뜨렸다면 슬리퍼를 휘두르는 상황은 그 시점에 끝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막아야 할 것이 사라진 뒤에 얼굴을 여러 차례 때린 행위는, 앞선 사정이 무엇이었든 방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재판부가 분풀이라는 말을 쓴 것도 그 구간을 가리킨 것으로 읽힙니다.
여기에 두 사람의 힘의 차이가 겹칩니다. 한쪽은 요양원에서 일하는 60대이고 다른 한쪽은 돌봄을 받는 80대 치매 환자입니다. 같은 행위라도 침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정도였는지를 볼 때, 이 격차는 그대로 계산에 들어갑니다. 대등한 두 사람 사이에서라면 방어로 볼 여지가 있는 대응도 이 구도에서는 남지 않습니다.
돌봄 현장에서 이런 사건이 반복되는 배경에 인력과 노동 강도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오래 있어 왔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다뤄야 할 문제이고, 개별 사건의 책임을 대신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정당방위는 상대가 먼저 시작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언제 멈췄는지로 판단됩니다.
상해치사가 폭행치사·살인과 각각 어디서 갈리는지, 사망이라는 결과가 형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는 아래 상해치사 편에 정리돼 있습니다. 상해죄 자체의 성립 범위, 그리고 돌봄 관계에서 벌어진 사건이 노인학대로 별도 평가되는 구조도 함께 보시면 이 사건의 무게가 어디서 나오는지 잡힙니다. 1심 형이 항소심에서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왜 많은지는 형사 항소 편에서 확인하세요.
상고 여부는 보도에 나와 있지 않아 이 판결이 확정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피고인이 주장한 피해자의 행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폭행이 몇 차례에 걸쳐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보도만으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정당방위 판단의 핵심이 그 구간에 있는 만큼, 여기서의 설명은 재판부가 밝힌 결론의 방향을 따라 재구성한 것입니다.